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문단 편집) === 파르티아 원정과 최후 === 크라수스는 집정관 임기가 끝난 뒤 시리아를 배정받는 법이 통과된 직후부터 [[파르티아]]를 정벌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혔다. 이에 정적들은 파르티아가 로마의 이익에 위협을 준 적이 없는데 굳이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그의 의도가 사악하다고 비난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호민관 안티스티우스 베투스(Antistius Vetus)는 [[릭토르]]들에게 로마에 무익한 전쟁을 일으키려하는 집정관 크라수스를 체포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이 나서지 않자, 그는 집정관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이를 무시하고 기원전 55년 말 집정관 임기가 끝나기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시리아로 향했다. 기원전 54년 봄 시리아에 도착한 크라수스는 곧바로 군대를 징발했고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BC 55~BC 34 재위),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 2세, 아랍 왕자 알카오도니오스(Alchaudonius)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북부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여 이치나이 인근에서 파르티아 총독 실라케스의 파르티아 분견대를 격파했다. 이후 54/53년 겨울 시리아로 철수하면서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에 7,000명의 보병과 1,000명의 기병을 배치했다. 플루타르코스는 바빌론과 셀레우키아를 공략할 수도 있었는데 철수해버리면서 파르티아가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며, 시리아로 철수한 것은 크라수스의 큰 실책이었다고 비판했다. 기원전 54~53년 겨울, 크라수스는 예루살렘 사원과 시리아 히에라폴리스의 아타르마티스 여신의 성역을 약탈했다. 이 무렵 카이사르 휘하에서 갈리아인들을 상대로 활약하던 아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수천 명의 갈리아 기병과 함께 시리아에 도착했다. 아르타바스데스 2세 역시 시리아에 와서 파르티아의 강력한 기병대가 제대로 활약할 수 없는 아르메니아 산악지대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라고 조언하면서, 1만 기병대를 제공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시리아에서 사막을 거쳐 메소포타미아 평원으로 곧장 진격하는 계획을 선호했다. 한편, 파르티아 [[샤한샤]] [[오로데스 2세]]는 2명의 지휘관을 파견하여 북부 메소포타미아 도시 몇 곳을 탈환하고 로마 수비대를 학살했다. 뒤이어 사절을 크라수스에게 보내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만약 파르티아를 침공한 로마군이 로마 원로원에서 보낸 것이면, 샤한샤께서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군대가 망령 들린 크라수스의 탐욕 때문에 온 것이라면 샤한샤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돌아가게 해줄 것이다." 크라수스는 격분하여 사절단을 내쫓은 뒤 파르티아를 향한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보병 30,000명에서 40,000명, 기병 4,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오로데스 2세는 친히 아르메니아를 치는 한편, [[수레나스]]에게 1,000명의 [[카타프락토이]], 궁기병 9,000명을 맡겨 로마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게 했다. 크라수스는 아르타바스데스 2세의 구원 요청을 받았지만, 먼저 셀레우키아를 공략한 뒤 아르메니아를 구하러 가겠다며 계획을 밀어붙였다. 부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진격하자고 주장했지만 거부당했다. 크라수스는 현지의 아랍 부족장인 아리암네스의 안내에 따라 사막 지대를 가로질러 진군했다. 아리암네스는 과거 폼페이우스의 원정에 협력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크라수스의 신임을 받았다. 고대 로마 역사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리암네스는 파르티아 측의 사주를 받아 로마인들을 사막 한 가운데로 유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크라수스 본인이 사막을 강행 돌파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기를 택했던 만큼, 아리암네스가 매수되었다는 이야기는 로마 역사가들이 외부인인 그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원전 53년 5월 6일, 크라수스의 4만 로마군은 [[카르헤 전투]]에서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 기병 10,000 명과 격돌했다. 그 결과 로마군은 철저히 농락당했고,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휘하 게르만 기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아들의 수급이 창에 꽂혀 있는 것을 본 크라수스는 심히 낙담해 숙소에 틀어박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크라수스의 부관들은 열띤 논의 끝에 인근의 카르헤 성채로 피신하기로 하고, 야밤을 틈타 부상자 4,000명을 숙영지에 버려둔 채 이동했다. 크라수스는 자신이 명령하지 않았는데 군대가 철수하는 상황에서도 별다른 지시를 하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에서야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다음날 적이 야간에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된 수레나스는 즉시 추격했다. 먼저 숙영지에 남아있는 로마 병사 4,000명을 도륙하고, 뒤이어 퇴각 도중에 낙오된 적병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이윽고 크라수스와 로마군이 피신한 카르헤 성채에 도착한 파르티아군은 그곳을 에워싸고 평화 협상을 하자고 요구했다. 크라수스는 수레나스의 의도를 불신해 협상에 불응하려 했지만, 전쟁에 신물이 난 병사들이 협상에 응하도록 강요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부관 몇 명과 함께 수레나스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플루타르코스는 이후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크라수스가 자신의 말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자, 수레나스는 "필요없소. 샤한샤께서 이것을 주실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 순간 크라수스 옆에 황금 굴레로 장식된 말이 나타났다. 크라수스는 말을 타지 않으려 했지만 수레나스가 강요하자 어쩔 수 없이 올라탔다. 파르티아 기수들이 그를 에워싸고 말을 때리기 시작하자, 말은 미친듯이 날뛰었고 크라수스는 거의 고꾸라질 뻔했다. 옥타비우스가 먼저 고삐를 잡았고, [[트리부누스 밀리툼|트리부누스]] 페트로니우스가 뒤따랐다. 나머지 사람들은 주위에 서서 말을 잡고 양쪽에서 크라수스를 압박하고 있던 파르티아인들을 밀어내려 했다. 이로 인해 격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옥타비우스는 칼을 뽑아 파르티아인 기수 한 명을 죽이고, 다른 기수는 옥타비우스를 뒤에서 공격해 죽였다. (중략) 크라수스는 엑사테르라는 파르티아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크라수스가 평원으로 내려가자 파르티아인들이 황금으로 장식된 말을 제안했다. 크라수스는 이를 모욕으로 간주하고 거부했고, 양자는 곧장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도중에 크라수스가 심각한 부상을 입자, 로마인 한 명이 그를 죽였다. 파르티아인들은 크라수스의 탐욕을 조롱하면서 죽은 크라수스의 입에 녹은 금을 부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크라수스의 머리와 오른손은 오로데스 2세에게 보내졌다. 당시 오로데스 2세는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가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격파하고 그로부터 봉신 서약을 받아낸 뒤, 장남 [[파코로스 1세]]와 아르타바스데스 2세의 누이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결혼식에서 그리스식 연극이 한창 진행 중일 때 크라수스의 머리와 오른손이 도착하자, 크라수스의 머리는 연극 기획자에게 주어졌고, 무대의 소품 대신에 이 머리를 사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로마군은 카르헤 전투에서 전사 20,000명, 포로 10,000명에 달하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단 10,000명 만이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인도하에 시리아로 피신했다. 또한 수많은 [[군기 #s-2|군기]]가 파르티아에 탈취당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군기 #s-2|군기]]를 잃는 것은 불명예스럽게 여겨지지만, 유달리 명예를 중시하고 시민들 대다수가 참전 군인이던 로마 사회에서 대장기를 잃었다는 건 나라 전체의 수치로 여겨졌다.[* [[파스케스]] 등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도 잃어버릴 경우 당사자는 물론 해당 부대까지 커다란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 여담으로 이 대장기를 되찾기 위해서 파르티아 원정은 계속되었는데, 카이사르가 시도하려다가 [[암살]]되었고, 후에 [[트라야누스]] 시기에 [[메소포타미아]]까지 진격해 최대 유프라테스 강까지 영토를 확장했지만 그러기까지 로마도 너무나 힘들었다.[* 군단기 자체는 [[아우구스투스]]가 파르티아 왕 [[프라아테스 4세]]에게 [[무사(파르티아)|무사]]를 애첩으로 선사하는 것으로 돌려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